2007년 12월 10일
짧은 이야기 24 - 어깨 아래 10 센티미터

소년이 소녀를 만난 건 열 다섯 살 때였다
교회 성가대 멤버였던 소년은
소녀를 보기 위해 성가대 연습을 한번도 빼먹지 않았다
소녀는 음정이 자주 틀렸다
알토를 맡았던 소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
연습과 함께 늘어난 게 있다면 노래 실력이 아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 목소리에 섞여 자신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나 하는 요령이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성가대 전체가 대성리로 야유회를 갔다
튜브를 빌리고 수영복을 갈아입고 강가로 달려가
수영을 하거나 물싸움을 했다.
몇몇은 비치발리볼을 했다
소년은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속살을 보았다
하나같이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학생들 틈에서
소녀 혼자 비키니를 입고 비치볼 던지며 놀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던지는 비치볼을 받아서 쳤다
폴짝 폴짝 소녀가 뛸 때마다 그녀의 젖가슴도 함께 뛰었다
얼마 후 둘은 숨을 할딱거리며 강가에 앉아 물수제비를 떴다
소년의 눈은 강물 위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소녀는 노래뿐만 아니라 물수제비도 잘 뜨지 못했다
"난 왜 이렇게 안되지? 어떤 돌을 던지면 좋겠니?"
소녀는 손바닥에 돌 두 개를 올려놓고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소녀를 돌아보면서 조금 납작한 돌을 가리켰다
소녀는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던 소년의 눈에 소녀의 어깨가 들어왔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 아래 10 센티미터쯤에 진한 보라색 점이 있었다
그리다 만 꽃 모양의 점은 손가락으로 누르면 가려질 정도의 크기였다
소년은 자꾸 그 점을 쳐다보았다
십 년 후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네 어깨의 점이 보고 싶어."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소년은 자주 이 말을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소녀에게 했다
그 암호를 사용하는 한 둘은 소년과 소녀일 수 있다고 소년은 믿었다
소녀는 어떤 때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때는 도리질을 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 날,
소년은 어딘가 염두에 둔 장소로 소녀를 데려갔다
공원이기도 하고 산길이기도 하고 소파가 깊숙한 카페이거나
때로는 모텔이기도 했다
소녀의 키가 자라면서 보라색 점은 조금 더 커졌다
채송화 꽃만큼 자란 그 점에 입을 맞추면
소년은 소녀가 영원히 자신의 소녀일 거라고 믿어졌다
"나, 이 점 뺄까 봐."
어느 날 소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무슨 소리야?"
소년은 깜짝 놀라서 다그쳤다
"그냥, 나를 바꾸고 싶어서."
"그러니까 왜?"
"성형수술을 하거나 목소리를 바꿀 수는 없잖아.
그냥 점이 없어지면 내가 다른 나처럼 느껴질 것 같아."
"너, 절대 안돼! 난 이 점이 좋단 말이야."
"난 지금의 내가 싫어졌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이유가 뭐야? 다신 그딴 소리 하지 마."
둘은 그런 식의 대화를 한참 동안 더 주고받았다
어깨의 점은 사라졌다
소녀도 사라졌다
소년도 사라졌다
소녀가 아닌 그녀는 자신의 다른 부위에 다른 점이 생겼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암호 같은 건 사용하지 않는다
허리 아래 5 센티미터쯤에 새겨넣은 누군가의 이니셜은
부름 없이도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녀가 다시 지우지 않는 한...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7/12/10 00:38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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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듯 하면서도 무언가 남는 글들이 읽기 좋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들 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