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11일
짧은 이야기 34- 초등학교 동창생

"삼십 년만이구나."
나를 보자마자 네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참,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나이가 되었다니.
대체 얼마를 살았길래 30년만에 만날 수가 있는 거니?
"고대로네."
이것은 너를 보자마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럴 리가..."
너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농담이네, 그런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렇겠지. 우리가 안 변했다면 그게 어디 인간이냐.
인조인간이 아닌 이상 우린 엄청나게 변했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너를 만나고 삼 년이 지났다
초등학교 이학년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서로 틈만 나면 상기시켰으며
지금의 이 모습을 그때 벌써 알아봤노라고 장담도 했다
어느날 너는 내가 너한테 빌려가서 갚지 않은 지우개며
연필 얘기를 했고 얻어먹은 떡볶이와 하드를 들먹였다
네 입에서 재구성된 아홉살의 나는 가난했고 뻔뻔했고 게걸스러웠다
너는 네 공책에다 함부로 낙서를 했으며
내가 좋아했던 내 짝궁의 치마를 들추었다.
내 건 물론이고 다른 애들의 도시락 반찬을 휘젓고 다니는 무뢰한인데다
친구 생일파티에 빈손으로 가고 남의 시험지는 몰래 훔쳐보았으며
콤파스로 내 팔을 찌른 적도 있었고 내 가방을 발로 차는 짓도 예사로 했다
내 기억 속의 너는 파렴치한이었다
지금도 남의 등을 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기꾼에 가까운 부동산 재벌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의 선두주자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내 열등감을 무마하려고 했다
나보다 반 석차가 십 등 넘게 뒤쳐져서 내 도움 없이 숙제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었고
지금도 부동산을 제외한 어떤 화제도 감당할 수 없는 무식쟁이였다
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내 연봉과 학생들에 대한 무관심을 들먹였다.
교수라는 나의 직함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혹시 논문을 표절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말싸움에서 논리로나 경력으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여전히 비겁하고 게걸스럽고 구질구질한 내 어깨를 밀치고 너는 택시를 잡아탔다
삼년을 내리막길로 우리는 다시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우리는 아홉살이 아니었고
아홉살이 될 수도 없으며
더욱이 아홉살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마흔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너는 나에게 죽을 때까지 내 답안지를 베끼는 공부 못하는 초등학교 동창생일뿐이다
나는 너에게 죽을 때까지 네가 산 떡볶이에 포크를 들이미는 아홉살짜리 똘만이일뿐이다
왜 연락을 하지 않는지 알고 싶지 않은 채
왜 연락을 끊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우리는 곧 오십이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03/11 20:44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하는 '하나도 안 변했다'는 말...
한번쯤 누구나 생각해봤을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