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28일
짧은 이야기 35 - 너의 왼쪽 귀

십 년 만에 너의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하고,
꽤 명망 있는 회사의 엘리트사원으로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우리가 들었던 소식은 거기까지였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듣는 동창의 소식이란 게
믿거나 말거나 류의 것들이 꽤 되는 터라
별로 귀기울여듣지 않았다
너를 코엑스쇼핑몰에서 만났다는 P는
네가 자기를 못 알아보더라고 씩씩거렸다
그 말에 좌중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P를 못 알아보다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용모를 가지고 있다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그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P가 어디 보통 놈이었던가
학교 다니는 동안 삼년 내내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며
정학에 근신에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던 놈 아니던가
P한테 안 맞아본 남자애가 한 명도 없을 정도다
다들 이상하다는 듯 그의 럭비선수 같은 체격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게다가 네가 말을 못 하더라고 했다
P가 아는 척을 하면서 다가가자
너는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한참 굳은 듯 서 있다가 그냥 가버리더라고
우리의 다혈질 전사 P가 쫓아가서 어깨를 밀치기까지 하면서
괘씸하다고 욕까지 했는데도 묵묵부답이었고 무반응이었다고 했다
갖가지 추측이 무성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너의 짝이었던 내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뭘 기대하는 건가, 나는 어깨를 들어 올렸다 내리며 할 말 없음을 선언했다
그래, 난 너에 대해 기억하는 게 별로 없다
너는 일등을 놓치지 않고 깨끗이 다림질 된 깔끔한 옷을 입는 모범생이었지만
같은 반 친구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짝꿍이었던 나조차 너와 얘기를 나눠본 적은 거의 없었다
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내가 기억하는 너는 칠판을 향해 얼굴을 똑바로 들고
수업에 열중하는 모습뿐이다
네 얼굴 중에서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부분이 있다면
내 쪽에서 볼 수 있는 왼쪽 귀뿐이다
남자치고 조금 작다 싶은 작고 앙증맞은 귀는 바짝 깎은 머리 때문에
다 볼 수 있었으므로 비교적 뚜렷이 기억한다
너는 내게 왼쪽 귀 말고는 보여준 게 없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지어는 공부가 재밌는지 아닌지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애들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너의 왼쪽 귀가 궁금했다
지금은 머리가 귀를 덮었을까
그 귀로 이제는 수업이 아닌 무얼 들으며 살까
귀걸이는 했을까
P로부터 끝내 너의 왼쪽 귀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
나는 네 왼쪽 귀의 안부가 궁금하다
# by | 2008/03/28 10:20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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