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37 - 비, 눈물, 꿈, 나무



당신이 우는 꿈을 꾸었어요
스물두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한번도 울지 않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맹세했다고.
하지만 꿈속의 당신은 말을 멈추고 눈물을 흘리더군요
슬픈 일이 있었던 것 같진 않았어요
당신의 곱슬머리가 이마를 덮고 손바닥은 얼굴을 가리고
소리도 내지 않고 아주 조금씩 가끔씩 어깨만 들썩거렸어요
그래도 나는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이 우는구나

내 꿈인데 이상하게 나는 보이지 않았어요
난 생각했어요.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어도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다 용서해주고 싶다고.
당신이 연장이 든 가방을 내려놓고, 허리도 꼿꼿이 세우지 않고
그 환한 웃음도 거두고 그렇게 오래 울 수 있다는 건
당신은 아직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세상을 버렸더니 세상도 나를 버리더라고 말하던
괴팍한 냉소주의자는 어디로 간 걸까요?

그 다음 장면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언덕이었어요
거기에 반쯤 지어진 집이 있고 한쪽 구석에 빈 막걸리병과 함께
당신의 연장가방이 보이더군요
네 귀퉁이가 닳고 색이 바랜 진회색 가방 말이에요
아무리 새 가방을 사주겠다고 해도 한사코 그 가방만 들고 다녔잖아요
그 가방을 거기 놔두고 당신은 어디로 간 걸까요?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공사장에 햇볕만 쨍쨍 내리쬐고 있어요
이번에는 내 울음소리가 들려요
큰 소리로 울면서 당신 이름을 불러요
이제 기억이 나요
그래요, 누군가 와서 당신을 데려갔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짓던 집 위로 비가 내려요
연장가방도 젖고 나무들도 젖고 시멘트 포대도 젖었어요
이 비가 곧 꽃들을 부르겠지요
당신은 어디 간 걸까요?
언제 올 건가요?
난 당신을 오래 기다릴 수 없어요
울음소리는 들리는데 찾아다니는 내가 보이는 않는 걸 보면
난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게 틀림없어요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릴 사람은 아니잖아요
난 분명히 당신을 찾아나설 거고 꼭 찾아낼 텐데...

당신이 그리워요
당신의 이름을 더 많이 불러줄 걸 그랬나 봐요
사람은 자기가 이름을 불리운만큼 다음 생에서 행복하게 산대요
당신의 손길이 그리워요
유난히 주름이 많은 당신의 작은 손을 잡고 싶어요
당신의 대패 소리, 망치 소리가 그립고
당신과 나눠 마시던 막걸리 맛도 그리워요
돌아올 거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올 거죠?
남은 인생은 나를 위해 살겠노라고 약속했잖아요
죽어도 나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당신이 아끼는 망치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같이 살기로 했잖아요
나도 이제 간신히 못을 구부려뜨리지 않고 박는 방법을 배웠는데...

당신, 보고 싶어요

울다가 잠에서 깼어요
꿈이었어요
당신이 운 것도 내가 운 것도 모두 사라진 것도 다 꿈이었어요
그래도 비가 오는 것은 생시와 똑같네요
창밖에 비가 살금살금 내려요
비가 오고 바람도 불고 가로등 불빛은 침침해요
나는 꿈속의 당신처럼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
소리없이 어깨만 들썩이며 울고 있어요
이렇게 우니까 목이 아프군요
목줄기가 따끔거리면서 쓰라려요
다음부턴 당신도 소리를 내면서 울어요
그래야 내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올 수 있으니까

비 때문에 그런 꿈을 꾸었을 거예요
화단의 은행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여요
그 옆의 상가에 핀 목련도 같이 흔들려요
서로 외롭지 않기 위해서인가 봐요
윗집 여자는 새로 나온 거미의 신곡을 크게 틀어놓고
몇 번이나 '미안해요'를 리와인드시켜서 듣고 있어요

다시는 나를 위해 울지 마세요
언젠가 나 때문에 울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 말도 취소하세요
그런 비슷한 생각조차 버려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우는 어리석음은 한번으로 족해요
당신 아버지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다구요
내가 살아 있을 때 많이 웃어주고 죽은 다음엔 울지 말아요
난 당신의 웃음이 좋아요
유난히 새하얀 못생긴 앞니 두 개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당신이 쓰는 죽염치약 냄새도...

오늘밤 비 오는 이 밤에 딱 한번만 울고 저도 울지 않을게요
내일 당신 연장가방을 들어주려면 다시 잠들어야 해요
당신이 내가 아는 곳에 있어서 안심이 돼요
당신 숨소리가 들려요
이제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굿나잇, 마이 러브!

그런데 내일 아침엔 해가 뜰까요?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오제이 | 2008/04/05 17:38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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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4/05 20: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4/05 21:0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4/05 21: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달밴드 at 2008/04/06 12:14
왜다 비공개 덧글이죠..

정말 잘 읽었습니다. 메마른 감성이 촉촉히 젖는 느낌이에요..

추천드리고 갑니다.
Commented by 오제이 at 2008/04/06 21:07
한두 사람이 비공개로 덧글을 남기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따라하네요...ㅎㅎ
그냥 공개로 편히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말 하면 좋을 텐데...
감사합니다.. 즐거이 읽어주셔서~~~
Commented at 2008/04/07 00: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04/07 13: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카삐 at 2008/04/07 14:05
와 ..정말 잘읽고 갑니다 ㅠㅠ!!! 학교에서 보고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네요 ㅠㅠ...
감사하다는 말 남기고 갑니다 ^^..
Commented by ifelse at 2008/04/07 17:00
꿈속의눈물..
다른 이를 위한 눈물..
슬픈걸까요.. 행복한걸까요..a..
슬프니까 울지만.. 그걸 알고 이해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이있다는건 행복한거겠죠?..
글이 정말 인상깊어요 잘읽 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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