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26일
짧은 이야기 41 - 흰 운동화

그거 하나 남았다
네 물건이라면 깡그리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신발장 저 안쪽 구석에 하얀 운동화가 있었다
270mm 아디다스 민무늬 운동화
너는 그걸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
백치미 운동화라는 별명으로 불렀었지
저걸 사던 날이 생각난다
네 발을 씻겨주다 우연히 네 발뒤꿈치를 보게 되었다
거의 혹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큰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붉고 딱딱한 굳은살을 꼬집으며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너무 오래 구두를 신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운동화를 신으면 되잖아?
나의 대꾸에 너는 한심하다는 듯이 웃었었지
넌 그렇게 한심한 말을 하고 싶니? 물으면서.
수건으로 발을 닦자마자 나는 함께 나가자고 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새로 생겨서 제법 산뜻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운동화 가게였다
이것저것 요란스러운 운동화를 만지작거리는 너를 말리며
내가 고른 게 바로 아무 무늬 없는 단순한 흰 운동화였다
출근할 때 빼곤 맨날 이 운동화만 신고 다녀, 알았지?
세탁은 내가 책임지고 해줄 테니까.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 신은 남자 얼마나 멋있는데.
다짐과 약속과 부추김도 잊지 않았다
지금도 이런 운동화가 나올까?
흰 운동화라는 게 그리 유행을 타는 품목이 아니긴 하지
나는 오래 안 신어서 딱딱해진 운동화에 발을 꿰어본다
손가락 몇 개가 들어갈 만큼 공간이 남는다
큰 신발을 신는 기분이 나쁘지 않군
마치 넓은 방에 누운 것처럼 마음이 넉넉해지는걸
내 기억 속의 너에 대한 기억도 많이 없어져서
네가 차지하던 자리가 이만큼 넉넉해져 있음을 깨닫는다
두꺼운 등산양말을 신으면 괜찮지 않을까
뒤축을 꺾어서 신어도 되겠구나
나는 흰 운동화를 재활용할 궁리를 이것저것 해본다
기억의 공간이 아무리 넉넉해져도
미련스러운 미련의 자리를 걷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헐거운 운동화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어버린다
운동화를 미련과 함께 비닐 봉지에 담아서 재활용 쓰레기함에 넣는다
누군가의 굳은살을 부드럽게 해주기를 바라는 기도도 잊지 않는다
잠시 너의 뒤꿈치를 궁금해한다
이 정도 미련은 용서해주자 스스로를 토닥거리면서..
네가 넉넉하고 질좋은 가죽구두를 신어서
보기싫은 굳은살 따윈 생기지 않는 삶을 살기를 또 한번 기도한다
이제 남은 물건이 하나도 없으니 기도할 일 다시는 없을 테니까
맘놓고 길게 진하게 맘껏 기도를 퍼붓는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04/26 20:38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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