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자





노트북컴퓨터, 메모지와 파란색 하이테크펜,
커피 잔 두개와 구겨진 종이, 카카오와 자일리톨,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물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마치 소풍가는 아이들의 머리수를  세듯
주의깊은 눈으로 그 물건들을 눈 속에 집어넣었다

노트북에는 며칠째 같은 화면이 펼쳐 있었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고
다른 창을 열지도 않고
같은 페이지에 같은 문장으로 끝나 있는
파일을 노려보았다
"그날, 옆에 선 노인이 초겨울 바람의 매서움을
탓하던 11월의 어느 날, 신호등을 바라보던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쓴 마지막 문장이다

한달 동안 그녀는 아무 것도 읽지 않았다
읽을 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달이 아니라 최근 얼마간 그녀의 주의를 불러오는
소설이나 시는 없었다
그녀는 동료작가의 농담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서 소설가 만큼 좋은 소설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거야"
다른 작가의 좋은 소설이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라는 말을
오래 묵은 비밀처럼 털어놓았다

하이테크 펜을 들어 메모지에 몇 자 적는다
그 남자, 꿈, 가출, 초록불, 맨발에 슬리퍼, 초겨울...
그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두서없이 적었다
발길을 돌린 그 남자는 깜빡 잊은 담배를 사러 갔을까
버스카드를 충전하러 갔을까
편의점에 두고온 잡지를 가지러 갔을까
그녀의 펜은 어느 것도 적지 않았다

고속터미널, 기차역, 버스 종점, 종착역, 땅끝...
슬리퍼를 신고 기차표를 사는 남자
그녀의 머릿속에 몇 개의 그림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모니터를 바라보기만 할 뿐
그림을 펼쳐 글로 옮기지 못한다

메모지에 한 남자의 얼굴을 그린다
목을 그리고 몸통을 다리를 슬리퍼를 그린다
영문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그리고 주머니가 많이 달린 바지를 그린다
손에 방금 편의점에서 산 물건이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빈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그를 어디로 보낼까,
그녀는 하이테크 펜 옆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 문장을 친다
"신호등은 초록불로 바뀌었다.
추위를 호소하던 노인이 맨먼저 길을 건넜다"
그녀의 눈은 그를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신호등에 멈추어 서 있다

그녀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오제이 | 2008/05/15 08:13 | 문학 단상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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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5/20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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