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48 - 여행




당신은 나를 파도라 부릅니다
대양 끝 당신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가
아무 때고 언질도 없이 찾아와
모래톱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뺨을
사정없이 때린다구요

당신이 나를 파도라 부르면
나는 당신을 화산섬이라 부르겠습니다
새들도 날아오기를 멈추고
씨앗들을 실어나르던 바람도 멈추고
오직 파도와 씨름하는 일에 일생을 건
당신은 바위투성이의 화산섬입니다

긴 여행 뒤 검게 불탄 자리 바위섬에 당도한 나를
당신은 노래 부르며 맞이합니다
당신의 이마에 작은 풀이 하나 자라고 있군요
다시 바람이 찾아오고
바람이 씨앗을 날라왔겠지요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면 새들도 찾아올 겁니다
 
바다를 홀로 지키기 너무 힘들고 춥다던 당신의 불평이 잦아들 즈음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고
당신은 아름다운 동산을 이룰 것입니다
더는 파도에 뒤채이지도 않고
짜디짠 바닷물에 시달리는 시간들을 탓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느 날,
당신이 무심히 실려온 파도의 존재를 까맣게 잊을 즈음
나는 오롯이 당신을 감싸고 당신의 아름다운 동산 곁에 머물겠습니다
섬은 파도를 잊고 파도는 섬을 잊어야
바다는 비로소 바다의 풍경을 이룰 테니까요

그때까지 파도는 뒤채이기를 멈추지 않고
세상 끝까지 가는 발길을 멈추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행을 그만둔다면 파도는 더 이상 파도가 아닐 테니까요
멀리서부터 콰르르 콰르르 당신을 향해 달려갈 때
당신 묵묵히 나를 반겨주시기를...
당신 뺨이 아닌 당신의 벌린 두 팔로 스며들고 싶습니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오제이 | 2008/05/26 11:17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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