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13일
짧은 이야기 57 - 금반지 2

그녀는 금반지를 좋아한다.
이 말을 들으면 그녀 주위의 몇 사람은 큭큭 웃을 것이다.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사파이어도 아니고 겨우 금반지?”
그녀의 다음 말을 들으면 그 사람들은 더 크게 웃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진짜 좋아하는 금반지는 아무 장식도 없는 누런 순금반지이다.
가락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무덤덤한 반지.
그들은 입을 모아 웬 노인네 취향이냐고 타박할 게 틀림없다.
취향이나 기호란 참으로 묘해서 어떤 때는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로 밑도끝도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턱을 약간 치켜든 도전적인 얼굴에 항상 의문 부호를 달고 상대를 쳐다보곤 하는 그녀가
그런 취향을 가졌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다소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일 거라는 남들의 오해에 대해 그녀는 알지 못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다.
모든 타인에 대한 이해는 오해의 다른 말이라는 역설을 그녀가 믿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거나 한 인간의 심연을 이해하는 일이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그녀의 취향과 상관없이 그녀는 그 금반지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한 번쯤 혹은 두 번쯤 탐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곧 그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무얼 좋아한다고 해서 꼭 가져야 한다고까지 생각하지 않는 건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돈이 덜 든다는 면에서는 장점에 속하고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벌려는 의욕도 별로 없다는 건 단점에 속한다.
돈을 열심히 벌지 않는다는 건 이 사회에서 악덕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금가락지를 두 개나 가진 남자를 알고 있다.
남자의 양쪽 무명지에 나란히 낀 금반지는 샛노란 황금빛을 한껏 발하며 황금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모양의 바로 그 반지였다.
두툼하거나 보석이 박혀 있어서 재산가치로 환산될 것을 염두에 둔, 나이든 남자가 흔히 끼는 반지가 아니었다.
금반지는 그의 주름지고 검버섯까지 얹힌 늙은 손을 단숨에 개성있고 푸근한 느낌을 주는 다감한 손으로 격상시켰다.
단아한 디자인을 즐길 줄 아는 그의 각별한 취향이 그녀의 마음을 끌었다.
게다가 그 나이에 반지를 두 개씩 낄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거나, 받은 적이 있거나,
그 사랑을 여전히 귀히 여긴다는 뜻이니 더욱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한 마디로 아직 감정이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가진 풍부한 감성이 그를 젊어 보이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
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왜 반지가 두 개예요?”
그 질문의 진의는 아마도 반지 두 개의 출처, 증여자가 누구냐는 것일 것이다.
“음, 이거...”
그는 말을 얼버무렸다. 오른쪽 반지를 왼손으로 한 바퀴 돌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굉장히 중요한 반진가 봐요?”
이번에는 대답 대신 왼쪽 반지를 오른손으로 한 바퀴 돌렸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남의 손에 낀 반지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 어쩐지 점잖지 못하고 떳떳한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녀는 질문을 거기서 멈추었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 한 번의 계절이 바뀐 뒤쯤이었나.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그와 그녀는 함께 고춧가루와 생선 냄새가 배어 있는 복집에 앉아 있었다.
꽤나 거한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여유를 누린 걸로 미루어 좀 큰일을 치른 뒤였을 것이다.
“살아 있어서 이렇게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자네는 아직 젊어서 모를 거야.”
두 사람은 디저트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비장미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인지라 주로 조국과 민족과 세계에 대한 고담준론이 대화의 주를 이루었다.
그녀는 본래 지루하거나 심심하다는 감정을 잘 못 느끼는 편이어서 지루한 줄 모르고 들었다.
그 또한 무거운 얘기를 살갑고 정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세상사람이 아는 것처럼 그리 큰사람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녀는 잠깐 했다.
그녀가 아는 한 그는 그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항상 뭔가를 기다렸다.
올 사람을 기다리고, 다가올 날들을 기다리고, 가슴 두근거릴 아름다운 세상을 기다렸다.
현재 이곳에 없는 것,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그 기다림은 보는 사람을 슬프게 했다.
“답답해. 나는 여기가 너무 답답해.”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우리나라는 너무 좁아서 이 땅에서만 사는 삶은 갑갑하다고 했다.
남쪽과 북쪽이 확 트여 오갈 수 있어서 다른 말, 다른 음식, 다른 땅과 기운을 받아들여야 사람들의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그래야 서로 싸우지 않고 순해진다고.
“좁은 땅의 사람들은 거칠고 옹졸하게 생각하기 쉬운 법이야.”
긴 숨을 내쉬며 더 큰 포부를 펼쳐보이는 것으로 말을 끝맺곤 했다. 중
국으로, 러시아로, 유럽으로 뻗어나가야 기상 높은 민족이 될 거라고.
그러기 위해선 모두가 마음을 대문처럼 활짝 열어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평생을 바친 기다림에 지쳐 그의 잠은 늘 어수선했고 꿈자리는 뒤숭숭했다.
“내 살아 생전에 이 손에 반지가 하나만 남을 날이 있을까?”
무슨 뜻이지? 그녀는 그 갑작스러운 말의 뜻을 헤아리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건 내 게 아니야.”
그는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를 돌리며 말했다. 틈만 나면 반지를 살살 돌리는 것은 그의 오랜 버릇인 것 같았다.
마치 천주교 신자의 묵주처럼, 불교 신자의 염주처럼 뭔가를 기원하는 몸짓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의 눈을, 표정을 살피며 숨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한테 말이야, ... 저쪽에 아들이 하나 있어.”
그가 거의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할까 말까 망설이는 어조로 간신히 내놓은 말이었다.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알 것도 같았고 하나도 모르겠기도 했다.
다만 뭔가 단단한 것이 울컥 가슴에 맺혔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난데없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순금은 살아 있는 보석이라 끼고 있으면 닳는다는데. 더 닳아서 너무 가늘어지기 전에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텐데 어쩌나.’
그가 말한 ‘저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녀는 괜한 걱정을 했다.
순금의 황금빛 위용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것도 같은 마음이었다.
약조를 하거나 마음을 주고받을 때 왜 순금의 반지를 주는지, 그때는 그 황금빛이 왜 그리도 환한지도 알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꿈을 이루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반지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영혼은 날개가 달려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
그의 영혼은 ‘저쪽’의 아들에게 달려가 손을 맞잡고 오래오래 간직했던 시간만큼 닳아버린 금반지를 끼워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인가 그런 꿈을 실제로 꾸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무명지가 비어 있는 오른손을 그녀를 향해 흔들었다.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평안한 얼굴이었다.
그는 아이처럼 기쁜 목소리로 이별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나의 벗들에게 내가 저쪽 땅에 내 발로 다녀왔음을 알려달라고, 이젠 마음 가벼워져 깊은 잠 편히 잘 잔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꿈 속의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마치 그 반지를 자신이 돌려받기라도 한 듯 반짝이는 자신의 오른손을 그를 향해 힘껏 흔들었다.
그 꿈은 밝고 따뜻했다.
황금빛 꿈이었다.
짧은 이야기 54 - 금반지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07/13 22:13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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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았어요.
계속 건필하시길!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