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책로 6 - 수영장



육체.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다, 라는 말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라는 말보다 새삼스럽다. 부러 또는 무의식중에 우리는 육체와 상관된 것들을 멀리해왔다. 뭔가 불온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인 양 육체와 육체가 가진 욕구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다. 실제로 육체는 항상 우리를 위험하고 불건전한 상태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인자이기도 하다.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을 것을 육체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사고를 치는 것이다. 성욕, 식욕, 수면욕. 모두 우리를 난관에 봉착하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4대 욕구 중 마지막 것인 명예욕을 추구하고 돌보는 것만이 올바른 삶인 것처럼 배워왔다. 사회적 성공도, 부의 축적도, 자기 분야에서의 업적도, 모두 명예욕의 산물이고 그것은 사회에 대한 기여도와 비례한다고 믿는다.

자, 다시 육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 정신과 감정을 담은 용기로써의 육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잘 살필 줄 알아야 정신도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 그것은 가장 육체적인 욕구이다. 청결함에 대한, 만족에 대한 욕구. 육체는 단순하고 솔직하다. 정신은 육체의 이런 점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육체는 정신을 잘 구현해야 함은 물론이다.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가면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서로 닮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고 제각각임에 놀란다. 키와 몸무게를 떠나 팔다리, 배, 가슴, 엉덩이, 심지어 성기의 모양도 다 다르다. 우리의 정신 또한 그처럼 다를 것이라 짐작, 확신한다. 내면의 검열 없이 정직하게 육체를 바라보고 욕망을 솔직히 수긍하고 그것을 잘 관리할 때 우리의 정신도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쑥스러운 고백 하나를 하기 위해 이렇게 길고 따분한 서론을 들어놓고 있다.

수영복을 샀다. 이 말을 내 친구들이 들으면 다들 놀라자빠질 것이다. 나는 수영도 못하는데다가 수영장도 잘 안 가고, 수영복 맵시를 뽐내고 싶어 안달하는 노출증이 있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웬일이냐고 다들 야단법석일 것이다. 그들의 표정을 떠올리니 무슨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신이 난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라며 실없이 웃어 줄 테다. 난 이 말이 좋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살다 보면 이런 변명을 할 때도 있는 법, 너무 기죽지도 쩔쩔매지도 말고 솔직히 인정하자. 어쩌다 느닷없는 일을 툭툭 저지르는 게 나라는 인간임을.

믿거나 말거나 세상에 태어나 내 소유의 수영복을 사본 게 이번이 처음이다. 몇 번 수영복을 소유한 적이 있었지만 나보다 키가 큰 동생한테 물려받았거나 친구가 색깔이 맘에 안 든다고 준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뭔가 색다른 여름휴가를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궁여지책으로 찾아낸 게 시내 수영장에서 하루 종일 죽치자는 거였다. 그 안에서 친구랑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선탠크림 바르고 긴 의자에 누워 낮잠도 자면서 하루 톡톡히 본전을 뽑아야지 결심했다. 그러자면 멋들어진 수영복이 있어야겠다 싶어 백화점엘 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영복이란 게 다른 옷과 달라서 아무렇게나 고를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어떤 디자인의 어떤 프린트를 골라야할지 정말 막막했다. 수영복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것과 옷맵시가 전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촌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디자인이 오히려 물가에는 더 잘 어울린다는 얘길 몇 번 들었다. 점원이 입어보라고 권하는 것 중에서 적당한 걸 골랐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다. 입어보고 피팅룸 밖으로 나와서 거울을 봐야하는데 도저히 수영복차림으로 밖에 나올 수가 없었다. 내 배짱으로는 피팅룸 안에서 어때요? 이러면 맞는 건가요? 묻는 게 고작이었다. 수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을 뚫고서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빨간색 꽃무늬가 주조를 이루는 비키니로 골랐다. 어쨌거나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데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옷 한 벌 산 거하곤 비교가 안 되게 흥분되었다. 드디어 비키니를 입어 보는구나. 과연 내 몸매가 이 수영복을 소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뒷전이고 어딘가 근사한 데 갈 만반의 준비를 한 것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푸켓, 발리, 보라카이, 아름답다는 비치의 이름들이 떠오르고 거길 유유자적 거니는 내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서양여자들은 뚱뚱하니까 그 속에 섞여 있으면 뭐 그렇게 몸매 걱정할 일 있을까? 그리 챙피할 것도 없지 뭐. 곧 닥칠 일처럼 혼자 웃었다.

일상이란 게 이런 것일까.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에도 어쩔 줄 몰라 한단 말인가.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나쁜 감정은 아니었다. 수영복을 입고 나니 내 몸의 어디에 살이 붙었고 어디가 그나마 봐줄만 한지 적나라했다. 앞으로 한두 주일 살을 좀 빼면 물개까지는 아니더라도 쏘가리 정도로는 헤엄칠 수 있지 않을까, 구체적인 계획까지 생각했다. 수영복을 사들고 나오다 보니까 원피스나 바지, 치마, 재킷 같은 옷을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답답해 보이는지. 시원하게 속살을 드러낸 수영복만이 제대로 된 여름옷처럼 여겨졌다. 기분 전환에 이만한 약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산책, 그러니까 걷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운동이 수영이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살살 움직이며 물살을 느끼노라면 세상의 행복이란 그리 먼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느낀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 핏줄 하나하나가 물에 반응하며 몸이 풀리는 느낌이다. 아아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우스운 건, 기막힌 건, 차마 말하기 쑥스러운 건 나는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내 너스레를 들은 사람은 사기를 당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수영을 할 줄 몰라서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하면서도 수영이 주는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아마도 내가 물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나는 물이 좋아서 설거지나 빨래도 좋아하고 비오는 날도 좋아한다. 그러니 자연히 목욕도 좋아한다.

물속에만 들어가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어렵사리 큰일 하나를 끝냈을 때 내가 나를 위로하고 상 주는 방법 중 하나가 조금 비싼 술(이것도 물이네)을 마음 맞는 친구와 마시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목욕탕에 간다. 뜨거운 물, 찬물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신나게 목욕을 하고 찜질방에서 낮잠을 자는 거다. 그러면 마치 리폼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가벼워진다. 이런 나는 인간이 태초에 어류였다는 말을 무조건 믿는다.

얼마 전 친구의 초대로 여름철 비수기에 한가해서 놀기 좋다는 호텔 수영장에 간 적이 있다.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약간의 폐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목욕탕의 그 점을 항상 힘들어 했다. 사방이 꽉 막힌 밀폐공간 같은 느낌. 그래서 사우나도 잘 안 들어가고 들어간다 해도 금방 나온다. 사방이 탁 트인 호텔 수영장은 야외에 나와 있는 느낌마저 주었다. 거의 야외 수영장을 방불할 정도로 시원하게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몸매 자랑하는 늘씬한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장구치고 튜브 잡고 유유히 물 위에 떠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물론 새로 산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서. 그 행복감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감동을 받는 일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문득 눈 안에 들어온 장면이 뜻밖에 나의 누선을 자극하거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행운에 속한다. 얼마 전 나한테는 그런 감동의 순간이 찾아왔다. 게다가 그 감동의 여운은 또 얼마나 길었던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기상천외한 춤을 보게 되었다. 다름 아닌 클론의 멤버인 강원래가 추는 휠체어 댄스였다. 휠체어가 주는 온갖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를 한방에 날려 보내는 경쾌한 음악과 화려한 춤동작. 정말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론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는 강원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댄스음악을 하는 뮤지션 하나를 잃었구나,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음악이란 슬프고 무겁고 가수는 인상을 쓰면서 심각하게 노래를 불러야 감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클론의 음악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했다. 내가 미국의 그룹 ‘산타나’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클론을 좋아했다. 저 사람들 참 재밌게 음악 한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감탄했었다. 음악은 모름지기 저런 면이 있어야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즐거운 법인데.

발라드나 트로트의 애절한 곡들이 대세인 우리 가요계에서 클론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런 소중한 존재를 잃고 말았다고 나는 지레 희망을 버렸던 것이다. 강원래의 파워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꾸준히 재기 소식이 들렸고 다른 장애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역할을 자임하며 밝은 모습으로 생활해 나갔다. 뮤지션으로서의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재활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음악인으로 돌아왔다. 이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도 나는 가슴이 떨린다. 정신이 육체를 끌어주고 육체가 정신을 고양시키는 순간을 딱 맞닥뜨린 순간 내 눈시울은 시큰해졌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마비된 하반신을 움직이도록 도와주던 휠체어가 그의 꿈을 이어주는 도구가 될 줄은. 휠체어 댄스의 장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육체의 승리를 또 한 번 느꼈다. 인간의 육체는 결코 그리 나약한 것이 아니다. 나는 춤을 추는 그를 보면서 육체의 아름다움을 느꼈고 정신의 고귀함에 감복했다. 그는 이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건강하지만 나약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동받고 그의 음악과 춤에 감사하리라 믿는다.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휠체어 댄스를 추던 강원래가 푸른 물이 출렁이는 수영장에서 큰 고래처럼 우아하게 팔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아름다웠고 물살을 가르는 동작은 황홀할 만치 멋졌다. 넓은 수영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자기가 가진 육체와 그 육체가 빚어낼 수 있는 온갖 현란한 동작을 다 펼쳐 보이는 그를 나는 꿈 속에서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기분 좋은 꿈이었다. 마치 내가 그 물살을 가르고 헤엄이라도 친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속으로 몇 번이나 ‘화이팅!’을 외쳤다. 나에게 강원래는 푸른 물을 헤치며 수영하는 고래보다 멋진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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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이 | 2008/08/18 23:35 | 나의 산책로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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