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27일
짧은 이야기 69 - 포옹 5

내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직도, 역시 혼자였다.
그가 혼자가 아닌 장면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나와 함께 있을 때조차 혼자였고 그러니까 영원히 혼자이어야 했다.
다행도 불행도 아닌 사실로써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옛날에도 지금도 사람을 반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손님이 잘 들지 않는 식당 구석에 혼자 앉아서 주문을 받으러 오기를 기다리는 떠돌이처럼,
급할 것도 아쉬울 것도 절박할 것도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랄 것도 없는 무연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 시선에 더 이상 상처입지 않음에 안도했다.
어쩐 일로..., 나는 거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필요 없는 말이었다.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데 칠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로 나한테 연락을 한 거냐고 묻는다면
내가 가진 촌스러움의 정서가 변치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들키겠지.
나는 그랬다.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나 감정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전화를 하는 것도, 전화를 하지 않는 것도, 만나는 것도,
만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달랐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직장에 다니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도 이별을 하는 것도,
딱히 이유랄 게 없었다. 그저 일어나는 일일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하지만 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했다.
그건 그의 잘못인 것이다.
공유되지 못하는 표현법이란 빨리 거두어져야 한다.
그는 아무 것도 새로운 걸 배우려 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 손에 쥐고 나온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터득한 게 없다.
요구라도 할라치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담배를 빼어물고
최대한 멀리 연기를 날려보냄으로써 상대의 입과 자신의 귀를 막았다.
“연락처를 알아내기가 생각보다 쉽더라”
이런 핑계를 댈 줄 아는 사람인 것만도 다행이다.
나는 그 말에는 아무 뜻도 담겨 있지 않음을 안다.
쉽다거나 어렵다거나 그것은 다 허언일뿐임을...
그 어떤 것도 틀린 말이 아님을...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보인다.”
나는 예의라도 차리려는 듯이 한 마디 내놓았다.
그는 앞니를 반쯤 보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아보였다.
적대감이나 긴장이 많이 줄어든 것만은 사실이다.
“한번은 봐야할 것 같아서...”
그래... 한번은... 나는 그 말을 어금니에 물고 씹는다.
“으응....”
커피도 식었고 마음도 식었고 시간도 식어 있었다.
뜨거운 거라곤 부끄러움이나 새삼스러운 절망뿐이었다.
몇 마디 안부 비슷한 대화를 더 나누고
우리는 별 말을 안했음에도 서로 서둘러 헤어지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 강력하게 끌어당기지 않는 한 저만치 떨어져 있던 관계였음을 상기했다.
그 역할은 줄곧 내가 맡았었다.
나는 그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해서 그를 내 편으로 이끌었던가, 디테일은 잊었다
지금은 세트메뉴만을 시키는 사람이 되었다.
메인 디쉬와 디저트와 커피까지 따라나오는 메뉴를 시키면 무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애써서 뭔가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거 안 해본지 오래다.
아주 잠깐, 그에게 뭔가를 권하거나 부탁하거나 제안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밖에 나가서 걸을까? 맥주라도 마실래? 책 고르는 데 같이 가줄래?, 같은 것들...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역시 긴 시간이. 칠 년이란...
스타벅스를 나와서 조금 더 걸었다.
커피집의 소란이 우리 사이의 어색함을 상당히 줄여주었음을 알았다.
더 이상 아무 할 말도 할 일도 없었다. 그는 태연히 걸었다.
마치 이 어색함을 실컷 겪기 위해 나를 불러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확인사살 같은 건가.
햇볕은 유난히 따가웠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 고 생각하는 찰나 그의 걸음이 늦춰지더니 내 손을 잡았다.
버스 정류장 앞이었다.
“여기서 버스 타지?”
그는 내가 어디 사는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는지 알고 있다는 투다.
고개를 끄덕일밖에. 그의 몸이 내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쪽 팔로 내 어깨를 두르더니 내 앞으로 와서 섰다.
“그 날 말이야, 손 놔서 미안했어.
그때 내가 이렇게 너를 안아주지 못하고 그냥 가버려서 말이야.
그걸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구.”
그는 양손을 내 어깨에 올려놓고 나를 끌어다가 자기 품에 안았다.
여기는 버스 정류장이야, 말해주고 싶었다.
나의 감각은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칠 년 전으로 돌아가지지 않았다.
그날 나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돌아서도 괜찮고, 화를 내고 괜찮아.
내미는 내 손을 뿌리치지 말고, 한번만 안아주고 잘 지내라고 말해줘.
지금은....
내 코끝을 스치는 그의 냄새,
햇볕에 내다말린지 한달이 넘은 이불에서 나는 냄새.
'나는 이제 너의 냄새를 참을 수가 없구나'
나는 그의 팔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잘 가."
내게 그 한 마디가 남아 있었다.
그는 나의 행동을 회한쯤으로 해석하겠지
그 착각을 수정하지 않는 것이 내가 그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은 추억뿐만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둘 다 많이 현명해졌다
다 그 덕분이다
나의 천사, 미스터 백신....
# by | 2008/08/27 22:26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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