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9월 13일
짧은 이야기 77 - 포옹 9

쓰다...
그녀는 가끔 그렇게 혼잣말을 할 때가 있다
그 버릇이 생긴 것은 오래 전이다
많은 '첫' 경험들이 얽혔던 날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첫사랑인 남자와 첫 포옹을 하고
(말하자면 첫 섹스인데 실패로 끝났으니 그냥 포옹이라 부르자)
남자가 한 모금 빨고 건네준 담배를 받아서 피웠다
몹시 썼다
오직 그 느낌밖에 없었다
그 쓴맛이 섹스의 실패에 기원한 건지
오분 후에 있을 더 쓰디쓴 이별에 기원한 건지 모른다
다만 아주 썼던 첫 섹스와 첫 담배와 첫 사랑이었다
그 담배 이름은 카멜이었다
그녀는 그 담배를 처음 보았다
미국 냄새가 물씬 나는 담배를 천천히 다 피운 다음 남자는 말했다
"오빠 한 군데 오래 못 있는 거 잘 알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을 가거나 직장을 옮기거나 뭐 그럴 계획인가보다고 억지로 생각했다
설마 다른 여자에게 옮겨간다는 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즐거웠다"
연속극에서 백 번쯤 들었음직한 그 말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그녀는 남자가 다 피우고 재떨이에 비벼끈 허리가 꺾인 담배꽁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화를 낼까? 울까? 아니면 남자의 뺨을 때릴까?
그도 아니면 나도 즐거웠어, 하고 말하면서 악수를 청할까?
그녀는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었지만 문득 허술하게 입고 있는 자신의 옷차림이 의식되었다
헤어지는, 곧 헤어질 남자 앞에서 속옷만 입고 있다는 사실이 부당하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얼른 옷을 챙겨 입고 머리를 빗고 가방에 소지품을 담았다
"그래, 넌 내가 생각한 대로 역시 산뜻한 애야."
다소 실망한 듯한, 그러면서도 안도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자신이 남자와 다시는 이런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옷을 다 차려입고 가방을 챙긴 상태에서 새삼 옥신각신 대화를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만 갈게요."
그녀는 울고 싶었다
이별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 어려움이 닥치면 평소의 열배쯤 어리석어지는 자신,
그 자신을 이끌고 평생 살아야한다는 암담함 때문이었다
빨리 이 방을 벗어나는 것이 그나마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체취와 자신의 어설픈 숨소리로 가득찼던 애틋한 첫 섹스를 하던 그 방은
갑자기 곰팡이 냄새가 풀풀 풍기고 눅눅한 낡은 여관방으로 변했다
운동화 끈을 꿰고 있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주고 가라."
그녀는 돌아서지도 일어서서 나가지도 못하고 운동화끈을 풀었다 묶고 있었다
남자가 다가왔다
그녀를 일으켜세워 어깨를 돌려세우고 등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우리 좋았잖아. 미워하지 말자.
아니다. 미워할 땐 미워해야지."
그녀는 그 말을 속으로 생각했다
미워할 땐 미워해야지
남자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려고 했다
그때 눈가로 흘러내리려고 하던 눈물이 뚝 그치면서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키스는 싫어! 오빠 입냄새 참느라 그동안 죽는 줄 알았어요.
시체 썩는 냄새보다 더 지독할 걸요.
다음에 여자 사귈 때는 충치 치료부터 꼭 하세요. 잘 가요."
쓰다...
가끔 이 말을 내뱉거나 속으로 곱씹을 때면
그녀는 세상은 쓴맛을 배우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 어른스럽게 자신을 타이른다
그날 이후 그녀가 배운 쓴맛은 다양했다
커피와 카카오와 한약과 데킬라가 썼고
실패와 좌절과 오류의 맛도 썼다
모든 쓴맛 끝에 매달려 있는 어렴풋한 단맛이나 감칠맛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 건 큰 소득이었다
아직까지 그녀는 쓴맛을 견딜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었다
쓰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입안에 고이던 쓴물이 퇴색하게 된 건 그나마 다행이다
# by | 2008/09/13 11:57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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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유는 없고... 점이 많으면 좀 산만한 느낌이 들어서 처음에 그렇게 시작한 게 아마 버릇이 되었나 봐요. 생각해 볼게요...
말씀하신데로 온라인에 글쓰기에는 화면에 글이 꽉 차면 가독성이 떨어지는 감이 있어서, 가독성을 위해서 줄바꿈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는것 같더군요. 오제이 님처럼 마침표를 생략하는 경우는 어떤 연유가 있을까 그저 궁금했습니다. ^^;; 잘은 모르지만, 시를 적을 때에도 마침표를 안쓴다고 하는거 같은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네요. 국어 공부한지 하도 오래되어서.
양손 가득 그린 헤나가 지워지기 전까지 새색시는 집안일을 안해도 된다고 얼핏 들었던거같아요.ㅎ
전혀 글과 상관없는 댓글이 되고 말았군요-_- 하지만 입냄새부분에서는 백번 공감하고 갑니다. 커피와 담배로 얼룩진 입술은 키스하기에 거부감이 들더라고요.ㅎ덕분에 커피와 담배를 싫어하는 이유가 추가가 되었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