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9월 19일
짧은 이야기 79 - 포옹 11

일 년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훌훌 눈발이 창밖에 날리던 날 너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곧 미국에 갈 거라고 말했다. 아니 미국 동부로 갈 거라고 고쳐 말했다. 내가 너를 빤히 쳐다보자 ‘보스톤’ 그렇게 덧붙였다. 난 왜 그걸 지금 통보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도 목적도 계획도 알지 못한 채 그 엄청난 결정을 얻어낸 과정은 하나도 듣지 못한 채 말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연인이 연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식의 관계맺기이다.
미국이라니, 보스톤이라니.
그 결정을 나한테 이런 식으로 알리는 너를 나는 가만히 보고 앉아 있었다. 나도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좀더 설명을 해봐! 혹은 그게 다야? 하다못해 안된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섣불리 어떤 반응을 보이기가 두려웠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거라고 짐작한다.
금이 가기 시작한 도자기를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금이 간 도자기를 흔들어 쩌억 하고 소리를 내면서 깨져 버릴 것 같았다. 두려움에 휩싸여 아니 분노에, 슬픔에 빠져 나는 그냥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은 펄럭거리는 치마처럼 이리저리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곧 길이 막히겠는걸.”
나는 중얼거렸다. 너더러 빨리 돌아가라는 말이었을까. 아예 가지 말라는 말이었을까. 나는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걱정했다. 네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쪽으로 다가와 등 뒤에서 나를 감싸안았다. 너의 가슴은 여전히 풍만하고 부드러웠다.
“올 거지?”
너의 입술이 내 귀를 물었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서 네 입술을 털어냈다. 옷에 쌓이는 눈을 털듯이.
“가야지.”
늦었어. 이제 너는 집으로 돌아가야지, 라는 뜻의 말이었다. 너는 내가 네게로 갈 거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고마워.”
그 날 눈 속을 헤치고 네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던가. 그날 나는 눈을 바라보며 무사히 밤을 맞았던가. 그 모든 풍경은 폭설에 가려져 기억을 남기지 않았다.
네게 온 전화를 끊고 나는 그 날을 생각했다. 너는 일 년하 고도 열흘의 시간을 거스르려는 건가.
너의 대화는 바로 그 다음 순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눈이 참 많이 온다. 올 거지?”
“...”
“너를 안고 싶어.”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가야지. 뒤늦은 나의 대답. 너는 이제 정말 네 길을 가야지, 그런 뜻이었을까. 가야지, 그럼. 기다려, 이런 뜻이었을까.
이곳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길이 막히지 않았다. 내 발길을 막는 것은 눈이 아니라 시간이다.
우리들의 포옹은 그 눈 속에 다 녹아버렸다는 걸 너는 모르는 걸까.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09/19 17:20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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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은 웬지 먼 곳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 설명될 것 같았거든요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 보스톤은 오대호 연안이라고는 하지만 내륙인 시카고보다 거의 한 두배 정도 눈이 많이 오는것 같네요.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이름이기도 하구요..
제 친구가 시카고 사는데 그곳의 겨울날씨에 치를 떨더군요
한국보다 더한 추위라니...
눈과 추위...으으으
그래도 첫눈은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