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86 - 포옹 16




햇살이 방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있다. 어디서 왔는지 흐릿한 꽃냄새도 방안을 떠다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건 그것 말고도 많다. 바람과 음식냄새와 밥을 짓는 여자의 깔깔대는 웃음과 아이들의 울음소리,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야채장수의 고함소리. 그런데도 나는 잠이 깨지 않는다. 눈은 자꾸 감기고 머릿속은 멀건 죽처럼 멍하다. 햇볕은 다른 방문객들처럼 점점 더 깊숙이 들어와 방안에 떡 버티고 있다.

손님이 많은 날이구나.

나는 혼잣말을 했다. 머리를 책상에 누이게 했던 낮잠도, 자는 동안 목덜미를 쓰다듬던 누군가 손도. 그리고 낮잠에서 깨어난 지금, 문득 삼 년 만에 찾아온 기억. 그 속에서 그 손길의 주인공을 찾아낸다.

어둠이 없이도 꿈을 꾸다니, 나는 대낮의 허여멀건 태양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래서 빛이 없이도 너를 알아볼 수 있었겠지. 숙면과 악몽을 번갈아 선물하던 너.

마지막 포옹을 기억한다. 나는 네 어깨에 턱을 고이고 네 말을 들었다.

“멀미. 사랑은 멀미와 같은 거래. 차에서 내리면 곧 멎을 거야.”

너는 아파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오래 전에 알았다. 건강한, 이성적인, 상식적인 사랑은 네 것이 아니었다. 집착이, 몰두가, 환상이, 과대망상이 너를 지배할 때만 사랑할 수 있었다. 너는 이어서 말했다.

나는 이제 건강해졌어.

너의 포옹은 이제 나를 바닥으로 쓰러뜨리지 않는다. 가만히 안고 할 말을 마치고 너는 돌아섰다. 낮잠 속으로 찾아온 손길은 그때의 것이었다. 건강해진 너의 손길. 아픈 네가 손톱을 세우고 등을 파고드는 포옹이 아니었다. 꿈이었을까. 너는 분명 내가 자는 동안 이곳에 다녀갔다.

 네가 떠난 이후로 나는 이 방의 그 무엇도 바꾸지 않았다. 네가 있을 때 그대로,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네가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것들로 꽉 찬 이 방에서 나는 세 번의 겨울을 맞았다. 추운 겨울에는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는 너의 농담이 진담으로 바뀌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네가 떠난 이후로 나 또한 아플 때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달콤한 음식과 추억을 나누는 대신 쓰고 아릿한 피와 통증을 동반하는 사랑밖에 하지 못했다. 전리품치곤 지독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남긴 전리품 때문에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흥미진진한 지옥이었다. 열 배는 많은 에너지로 삶과 정면대결했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힘이 세진다고 누군가 말했다.

너를 떠올리면 소낙비를 피해 남의 집 처마 밑에 서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우리가 그렇게 만났기 때문일 거다. 나는 너에게 우산을 씌워주었었지.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은 모든 게 다 드라마틱했다. 너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차비를 빌리거나 핸드폰을 빌려 쓸 거라고 상상한다. 얼마 안 있어 장미꽃이나 초콜릿으로 그 빚을 갚겠지. 달콤함을 실천하는 데 있어선 일가견이 있는 너니까. 그 다음은 어딘가에서 밥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무릎으로 땅을 기는 너를 애써 생각했다. 뺨을 맞는 너도 피로를 풀지 못해 발이 퉁퉁 부은 너도.

낮잠은 이제 멀리 달아났다. 생각을 멈추었다. 나쁜 상상은 추억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햇살을 향해 몸을 쫙 편다. 방안의 다른 방문객들도 일제히 일어나 나를 보좌한다. 냄새도 소리도 바람도. 네 손길이 잠시 머물렀던 목을 최대한 길게 뽑으며 기지개를 켠다. 너의 체온이 길게 늘인 몸을 따라 온몸으로 번진다. 이 방의 거주자는 온전히 나이다. 매일 용건도 없이 찾아오는 지루한 방문객들과 함께. 상상조차 매일 다른 얼굴로 따라온다. 내일은 또 어떤 상상이 너를 변주할까?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오제이 | 2008/10/10 18:36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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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R    at 2008/10/11 03:32
오후 햇살은 때론 밤보다 더 꿈같아요.ㅎ
난 오제이님의 일상적인 느낌의 소설이 참 좋더라고요.자꾸 다시 읽게되요.
물론 다른 글도 마음에 들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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