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5일
짧은 이야기 88 - 첫눈 오는 날

어젯밤 다섯 개의 꿈을 꾸었다
그 중 네 개는 아주 끔찍한 악몽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첫눈을 맞는 꿈이었다
꿈 속의 나는 가방을 잃어버려 집에 못 가는 소녀이었다가
뱃속에 에일리언이 자라는 처녀였다가
뭔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울거나 화내는 사람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옴니버스로 꾸는 악몽이 두려워 잠을 안 자려고 했다
온갖 생각을 하고 화장실에 가고 찬물을 마시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이 펄펄 내렸다
꿈 속에서 나는 잠을 잘 자고 일어나 행복한 아침을 맞았다
기지개를 켜며 창문을 열었는데 밖에 새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첫눈 오는 날, 뭘 하기로 했더라."
중얼거리면서 손을 뻗어 손바닥에 눈을 받았다
'지금으로선 내가 인생에서 바랄 거라곤 첫눈밖에 없구나,'
어제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상을 받을 일도 보너스를 받을 일도 없는 지금,
기다리는 친구도 편지도 없는 지금, 나는 오직 첫눈을 기다린다
소심한 인간인 나는 그것을 꿈에서 실현한 것이다
잠깐, 일이 초쯤 했던 그 생각이 꿈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눈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눈 눈 눈... 나는 눈을 불렀다
분명 빗소리를 듣고 창문을 연 것 같은데 밖에는 눈이 내렸다
손바닥에 쌓인 눈은 크리스탈 알갱이처럼 빛이 났다
그러니까 모양은 눈인데 색깔은 투명한 비인 것이다
그게 다였다
눈을 바라보는 내가 꿈의 유일한 등장인물이었다
참, 내 목소리가 있었지
환희와 만족과 사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실제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눈이 왔어! 첫눈이! 와아!"
꿈을 깼다.
눈을 떴다.
눈속에 푹 잠겨버린 것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악몽의 여진은 눈에 씻긴듯 깨끗이 사라졌다
일어나 밖을 내다본다
창문 밖의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듯이 밝았다
아직 눈이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겠지
그동안 눈이 오는 날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눈
눈
눈
펄펄펄....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10/15 09:58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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