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7일
짧은 이야기 89 - 포옹 17

벤치는 축축했다.
초가을 서리가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축축하다. 공원 입구의 공중전화도, 벤치도, 풀잎도.
남자는 가방에서 신문지 꾸러미를 꺼내 벤치 위에 깔았다. 벤치 아래 가방을 내려놓고 스웨터를 둘둘 말아 머리를 누인 뒤 몸을 공처럼 말고 팔짱을 꼈다. 밤새 어디서 시간을 보내다 왔는지 그의 몸은 잠을 불러올 시간이 필요 없었다. 벤치에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이내 정적이 이불처럼 그를 둘러쌌다. 해는 차츰 높이 떠올라 풀잎의 이슬을 말리고 공중전화 철문의 냉기를 거둬가고 그의 두껍고 냄새나는 외투를 달구었다. 공원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조깅을 하거나 개를 산책시키거나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와서 신문을 읽었다. 남자는 몇 번 몸을 뒤집었다 펴면서 팔짱을 풀었다 다시 꼈다.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출 정도로 높아지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옷깃속에 묻었다.
그의 벤치에도 방문객이 있었다.
공원에 사람들이 많아져 더 이상 그의 존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북적일 때쯤 한 아이가 그가 누운 벤치 가까이로 다가왔다. 한손에 비닐 봉지를 든 예닐곱살쯤 된 사내아이는 남자를 한참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남자의 나이키 운동화 옆의 공간에 엉덩이를 걸쳤다. 때에 절어 본래의 색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더러운 운동화는 아이의 등받이 역할을 해주었다. 이 공원에는 벤치가 여섯 개쯤 있지만 이곳이 가장 아늑하고 방해받지 않는 장소에 위치해 있다.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벤치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것은 엄폐물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좋은 구도로 먼발치에서 보아도 멋진 그림이 되었다. 남자와 소년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곳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이는 남자가 몸을 한번 더 뒤척이는 틈을 타서 그 옆으로 몸을 누였다. 그는 놀라서 눈을 뜨더니 아이의 작은 몸집에 안심했는지 뭐라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나서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오가는 사람이 두 배쯤 늘어났다. 사람들의 손에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도심의 저 높은 빌딩에 근무하는 그들은 점심을 먹고 가까운 공원을 찾아 한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리라.
남자와 소년은 무엇에도 아랑곳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지만 조금씩,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조금씩 남자는 벤치 등쪽에 몸을 붙였고 아이는 남자의 가슴과 배 안의 둥그런 공간에 몸을 가두고 누웠다. 남자가 옷보퉁이를 꼭 끌어안은 형상이었다. 해는 이제 하늘 한가운데로 떠올랐다. 남자는 꼈던 팔짱을 풀고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적당히 리듬을 맞춘 숨소리에 따라 땀냄새와 입냄새, 옷에서 풍기는 냄새가 그들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공기 속으로 풀려나왔다. 둘의 표정 또한 평온했다가 고통스러웠다가 잠시 후 아무 표정도 없이 밋밋해졌다. 두 사람의 몸은 점점 더 둥글게 말렸고 점점 더 작은 공이 되었다. 그들의 잠과 꿈은 대체로 달콤해 보였다. 그들의 낮잠을 길게 이어졌다. 오직 허기만이 그들을 깨울 것이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10/17 09:15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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