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0일
짧은 이야기 90 - 포옹 18

오늘이란 말 참 다정하다.
오늘, 오늘, 오늘.
오늘 나는 무엇을 한다, 누구를 만난다, 집에 돌아간다, 여행을 떠난다.
오늘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의 시간이 내 머릿속을 흘러 가슴 한복판에 당도하는 순간을 음미한다. 어제는 지났고 내일은 오지 않았고 오늘은 지금 여기 내 곁에서 나를 꽉 붙들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은 발견했을 때처럼 가슴이 꽉 오르며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내게 주어진 수많은 오늘 앞에서 항상 지금처럼 그 오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날들은 그냥 지나쳐간다. 오늘 같은 날, 오늘은 내게 진짜 오늘이 되어 현존하는 시간 앞에 나를 우뚝 세운다. 내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 같다는 기분이 들며 크게 기지개를 켜고 하루를 열심히 살자고 결심한다.
파닥파닥 생명력 넘치는 오늘의 기분에 젖어 조금 게으름을 피우다보면 금세 오후가 된다.
오후, 오후라는 말 언제 들어도 신선하다.
몽롱하고 나른한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힘이 나고 즐거운 일이 마구 생길 것 같다. 아침도 밤도 아닌 오후를 나는 무척이나 사랑한다. 오후엔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우체국에 다녀오고 카페에서 뜨겁고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신다. 시장에 들러 먹을 것과 꽃을 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한다. 따사로운 오후에는 가게 주인과 싸울 때도 불평 한 마디쯤은 참을 수 있고, 흥정할 때도 에누리에 대한 보답으로 기분 좋은 말을 돌려줄 수도 있다.
오후 햇살이 방안 깊숙이 들어오면 짧은 낮잠을 잔다. 달콤한 낮잠에서 일어나 꽃의 시든 잎을 따주고 청소를 하고 옥상에 가서 널었던 빨래를 뒤집어주고 밀린 설거지를 한다. 무엇을 하든 내 발걸음은 가볍다. 때론 새로 배우기 시작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전화벨이 울린다. 낮잠에서 깬 친구가 꿈 얘기를 해준다. 오래 짝사랑하던 사람이 친구한테 사랑을 고백했단다. 꿈에서는 그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더라고 했다. 그건 척 보면 알 수 있다고. 그래 나도 믿는다. 사랑은 척 보면 알 수 있는 것임을. 친구의 기쁨과 설렘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수고 많았다. 나는 수화기 너머 손을 뻗어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오래도록 보채지 않고 사랑에 인생을 바친 그녀에게 상을 주고 싶다. 친구 또한 전화 속에서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드리며 나를 끌어안아준다.
“나를 정말 사랑하는 내 친구, 네가 있어서 나한테도 너한테도 좋은 일만 생길 거야.”
친구의 덕담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깔깔 웃는다. 미안하다. 고작 꿈에서 일어난 기쁜 일로 네가 이리 행복해 하는 사람임을 나는 몰랐었다. 미안하다. 수화기 너머로 길게 손을 뻗어 그녀를 꼭 안아준다. 머지 않아 그녀는 내게 꿈 얘기가 아닌 실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래야 공평하다. 그래야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오늘을 믿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꿈이라도 괜찮다. 너는 충분히 행복한 목소리를 내게 들려주었다.
"언제 운동화 신고 만나서 산책이나 같이 하자. 단풍이 절정을 넘어서기 전에. 그때 나머지 얘기 자세하게 해줘야 된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10/20 10:49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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