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8일
짧은 이야기 96 - 포옹23

내 방에서는 타인의 냄새가 난다. 일주일. 불과 일주일동안 이곳에 머물렀을 뿐인데 내 냄새는 사라지고 그의 냄새가 난다. 그는 자신이 머물렀던 흔적을 감쪽같이 지웠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책상 위에 스탠드도 노트북도 연필꽂이도 내가 쓰던 그대로다. 침대도 티테이블도 슬리퍼도 원래의 위치대로 있고 싱크대조차 깨끗이 청소된 대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뭘까.
고마워. 잘 지냈어. 행복하더라. 네가 살았던 방에 내가 있으니까 뭔가 너랑 겹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 이젠 니가 나랑 너는 달라, 라고 말해도 화나지 않을 거 같아.
그는 자신의 옷과 책을 가방에 넣어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응.
그럼 됐구.
다음에 여행갈 때 또 얘기해. 내가 집 잘 봐줄게. 알다시피 나야 떠돌이 신세잖아.
그는 미리 챙겨둔 자기 짐을 들고 떠났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야. 이런 기분은 아주 나쁜 건데. 나는 내 방의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서성댔다. 그가 나 몰래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살짝 감춘 채 떠난 것만 같았다. 혹시 방바닥에 동굴을 팠거나 천장에 카메라를 설치했거나 자신의 눈이나 손 하나를 여기 어디다 남겨두고 간 것처럼 나는 정말 내 방을 홀로 차지한 느낌이 아니었다. 후회가 되었다.
괜히 방을 빌려줬어. 기분 나빠.
투덜거리며 가방을 풀고 샤워를 했다. 졸렸다. 침대에 누웠다. 잠이 왔다. 꿈을 꾸었다. 잠이 깼다. 눈을 뜨고 가만히 꿈을 리와인드시켰다. 한 번도 꾼 적이 없는 꿈이었다. 나는 어딘가로 가고 거기서 누굴 만나 아주 행복하게 함께 지내는 꿈이었다. 분명 우리나라는 아닌 어떤 곳인데 나는 그곳이 아주 친숙한 듯 거리낌 없이 그 사람과 사랑을 나누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너무 행복하여 그 순간이 깨질까 조마조마했다. 이상하다. 나는 줄곧 악몽을 꾸었고 꿈을 꾸고 난 뒤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아침내 우울해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열기구를 타고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행복했다. 아아 행복해,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문장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불에서 미미하게 그의 냄새가 났다. 그의 살결이 만져졌다. 우리 학과에서 비교적 가깝게 지냈고 졸업하고도 우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악수와 가벼운 포옹 말고는 그와 스킨쉽을 나눈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꽉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으니 그의 존재가 더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그가 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나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내 몸이 아주 작아져 그의 품안으로 겨드랑이로 배꼽 속으로 숨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내 몸은 그의 손안에 쥐어질 정도로 작아졌다. 나는 작은 내가 좋았다. 정말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처음으로 내가 마음에 들었다. 눈을 감은 채 그에게 안긴 채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당분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 그는 사라져버릴 테니까. 아니다. 부정할 수 없는 그라는 존재가 내 앞에 우뚝 서서 뭔가를 요구할 것만 같아서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 by | 2008/11/28 04:51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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