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97 - 포옹 24


눈이 피곤했다. 가을 햇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시력이 나빠졌음이 틀림없다. 눈이 시려서 자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시리다가 침침하다가 가렵기조차 하다. 차츰 뭘 골똘히 보는 일이 힘들고 귀찮아졌다. 항상 졸리거나 지루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녀는 갖가지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 주의를 끌었다. 소용없었다. 나의 눈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고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나 어때?”

끔찍했다. 그녀가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타났다.
“네가 이렇게 용감한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나의 빈정거림에 화가 났는지 발길로 내 신발을 걷어찼다.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녀는 놀라는 내 표정을 보고 더 놀랐다. 하루아침에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타난 여자친구에게 화를 내거나 놀람을 표시하는 일이 예상 밖의 일이란 말인가. 거기다 레게파마를 하고 카우보이 부츠까지 신었다. 그런 그녀를 이해하는 것은 저 머리통 위에 얹힌 레게파마를 예쁘게 봐주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보다 더 화가 난 이유는 바로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녀의 눈을 영원히 잃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 청순한 눈을 볼 수 없다니. 화를 낼 힘도 없었다. 그래, 숫제 목을 졸라라,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리에겐 변화가 필요해."
그녀가 생각해낸 변화란 게 고작 쌍꺼풀이라니. 나는 연애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연애기간이 일 년을 넘어서자 우리의 대화는 줄곧 내용 없는 수다로 이루어졌고 조금만 까다로운 문제를 얘기할라치면 충돌하거나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요즘은 싸우는 일조차 관심도 의욕도 없었다. 이기려는 생각을 접으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항상 몸이 피곤했다. 잠자는 시간은 자꾸 늘어났다. 그녀를 만날 시간은 줄어들었다. 싸우는 횟수는 줄었지만 시간은 길어졌고 목소리는 높아졌다. 초창기 싸움에 있었던, 뭔가 해결을 보거나 뚜렷한 결론을 도출하려는 의지가 빠져 있기 때문에 곧 제풀에 지치곤 했다.


레게파마는 말하자면 트릭이다. 쌍꺼풀수술을 한 눈에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만든 가짜 이정표 같은 거다. 쌍꺼풀 없는 얇고 가늘게 찢어진 눈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게 없어진 그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나의 그녀가 아닌 것이다. 외모가 퍼스널리티를 결정한다더니 모든 게 달라 보였다. 나와 친해질까봐, 혹시 그 쪽에서 나를 유혹할까봐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던 그녀 친구, 선우처럼 크고 동그란 눈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수술한 눈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선우의 눈이 예쁜 눈이었음을, 노골적으로 도드라지지 않은 꽤 품위 있는 쌍꺼풀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에 만나면 다시 자세하게 봐야겠다. 이것은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그동안은 한번도 선우 눈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원래 쌍꺼풀 있는 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야 그녀의 수술한 눈에서 마음이 풀려났다.

"예쁘다 예뻐."

나는 그녀의 눈을 향해 윙크를 했다. 아직 부기가 빠지지 않은 눈으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그녀도 마지못해 따라 웃었다. 인심 쓰는 김에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고마워."

뭐가? 묻는 얼굴로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하하하... 나는 속으로 승리의 쾌재를 불렀다. 뭔가 큰일을 해낸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나 또한 궁금하다. 오래 갇혀 있던 동굴에서 빠져나온 듯 날아갈 것 같다.

by 오제이 | 2008/12/03 21:10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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