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올해 들어 온통 세상이 하얗게 펄펄 내리는 눈을 맞아본 건 처음이다
버스를 탈까 망설이다 두 정거장이니 그냥 맞기로 맘먹는다
눈이 나를 친친 감아 어디론가 끌고 가는 듯
앞이 보이지 않고 옷은 점점 흰색이 되어간다
걸어가는 눈사람... ㅋㅋ
뒤뚱뒤뚱 걸으면서 내 모양이 하도 우스워 키득댄다
매운 칼바람과 눈보라에 얼굴이 꽁꽁 얼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옥탑방 옥상에도 눈이 소복히 내렸다
창문을 조금 열어 눈 오는 걸 보면서 일을 한다
참 이쁘구나...
이 세상에 그 무엇이 있어 저렇게 보는 사람의 기분을 평화롭게 만들까...
밀린 일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앉아 있다 저녁을 맞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이 사위어 스탠드를 켜고 다시 찻물을 올린다
이럴 때 마시는 차나 커피는 천상의 맛이다
어깨를 펴고 창밖을 내다보니 눈은 그쳤고 옥상의 눈은 제법 높이 쌓였다
핫! 어느새 누군가 옥상에 올라왔었네
누가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부터 옥탑방 입구까지의 길을 비로 싹싹 쓸어 길을 내놓았다
눈이 가늘게 찢어지고 얼굴이 시커먼 주인집 아저씨의 고집불통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도무지 부드러운 말이라곤 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었네
계단을 올라가는 내 발소리를 듣고 혹시나 추운 날 얼어붙은 눈에서 넘어질까
그새 와서 눈을 쓸고 가신 거다
이 집안에서 낮에 집 지키는 사람은 그 아저씨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때 안도현의 '연탄재'라는 시가 생각났다
'너는 한때 누군가를 위해 내 전부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나'
뭐 그런 시였을 거다
나쁜 짓 안하고 평범하고 조용히 어딘가 쥐죽은듯 박혀서 살아가자는
나의 소극적인 인생관을 콕 찌르던 시..
세상에는 연탄재 같은 사람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전부를 불사르지 않더라도
나 말고 타인의 삶이 어떠한지 한번쯤 고개를 돌리는 일,
결코 쉬운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것도 소리 없이....

서로 모른 척, 스쳐지나가는 척 살아가면서
이렇게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을 나는 늘 인생이 가진 보석같은 면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끔은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문득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는다
어느 날 내가 옥탑방을 떠나더라도
소복히 쌓인 눈 사이로 난 그 눈길을 잊지 못하리라
내 인생의 앞날을 향해 누군가 그렇게 비질을 해주었다고 믿으며 마음에 등불 하나 켜리라

by 오제이 | 2009/01/27 10:49 | 일상의 메모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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