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2월 01일
짧은 이야기 105 - 어떤 여행
긴 머리를 묶었던 고무줄을 풀고 그녀는 플로랄 향기가 은은한 흰 시트 위에 몸을 눕힌다
머리맡의 낮은 조명도 쾌적한 공기도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도
그녀의 오늘을 위해 준비된 세트요 소품으로 맞춤했다
먼 산이 없었다면, 구석구석 주인의 손길이 닿은 넓고 깨끗한 방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 숙소에 묵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정성들여 세탁해서 곱게 다린 시트를 오른손으로 문지르다가 일어난다
소파 옆에 던져둔 여행가방의 지퍼를 연다
며칠쯤 묵을 예정인지 가방이 제법 크다
헝겊 주머니에서 모슬린 천의 잠옷을 꺼내 갈아입는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을까도 생각했지만
우선은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고 눈을 감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의 햇살이 누그러지며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일단 시작된 어둠은 급속도로 짙어지며
사람의 마음속까지 스며든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잠을 잤던가
하지만 그녀는 또 하나 알고 있는 게 있다
어떤 경우엔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 잠을 잔 것보다 더 안온한 기분이 든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 대해 그녀에겐 많은 거창한 계획이 있었다
그것을 제법 호기롭게 떠벌리기도 했고
며칠 밤 종이에 적어가며 여행을 빛낼 계획들을 수정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평소에 필요하던 화장품과 코트와 신발과 점찍어둔 명품가방을 면세점에서 사고
일 년의 수고에 대한 대가로 일본식 여관에 묵으며 휴식을 선물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최대한의 호사를 하게 한다는 계획에는 뭔가 빠져 있었다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뭔가를 더 덧붙여야 했다
그것이 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여행을 떠났다
그런 건 어차피 애쓴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몇 번의 경험에서 터득한 바다
가장 좋은 호텔에서 가장 좋은 일본식 정식을 먹고
채광과 청결과 뷰가 가장 좋은 방에서 잠을 잤다
그때마다 그녀는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한 성장을 했다
아이보리색 원피스에 보랏빛 재킷을 걸치고 걸을 땐 우아한 미소를 잊지 않았다
의식에 걸맞은 차림과 기분을 갖추는 건 자신에게 얼마간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또 한 겹의 피부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자신의 여행이 겨냥한 진짜 이유는 아직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를 뻗어 그것이 위로 올라올까봐 애써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조급하지도 않았다
드디어 어둠이 그녀의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이제 일어나서 화장을 고친 뒤 계획한 대로 바에 가서 칵테일이나 와인을 마셔야할 텐데...
그녀의 몸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잠옷이 너무 편안한 모양이라고
이렇게 쉬어본 지가 너무 오래 된 모양이라고 그녀는 이해했다
그래,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 거지 뭐, 자신에게 조금 더 여유를 주기로 했다
어두워진 방안에 켜놓은 은은하게 밝은 노란 불빛은 참 따뜻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양쪽 눈꼬리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참 이쁘고 따뜻한 불빛인데...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만이 줄이어 흘렀다
내버려두었다
휴가니까... 휴가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
눈물은 흐느낌을 불러왔고 흐느낌은 더 큰 오열을 더 큰 오열은 깊은 잠속으로 숨었다
비로소 그녀는 깊고 긴 잠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감긴 눈꺼풀 위로 다음날의 햇살이 비추었다
플로랄 향을 뿜던 시트에는 그녀의 체취가 배었다
곱게 다린 이불도 얼마간 구겨져 있고 그녀의 잠옷에서도 새 옷의 말끔함이 사라졌다
그녀의 눈꺼풀만은 어젯밤 이후 한 번도 열지 않은 채 오래 오래 감겨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지 몇 번 몸을 뒤채거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미소를 지었지만
눈꺼풀만은 그대로였다
그녀 여행의 진짜 이유를 꿈속에서 발견하기라도 한 듯 평안해 보였다
# by | 2009/02/01 10:46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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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하나 추가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