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8월 24일
짧은 이야기 10 - 나쁜 친구

나한테는 나쁜 친구가 있다
나쁜 친구한테는 나쁜 수첩이 있다
절대로 책 같은 건 읽지 않겠다고 결심한 날 산 수첩이다.
마음의 양식이 아닌 몸의 양식을 믿기로 했다는 듯이
우아한 가죽 장정의 빨간색 수첩에는
전국의 맛집이 가다다 순으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그 수첩의 효용을 시험하는데
꼭 마루타로 나를 부른다
음식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한번도 없다
그것이 내가 유혹에 약한 가장 큰 이유다
물론 나는 나를 향해 뻗어오는 모든 유혹에
긍정적인 답을 하는 편이다
그것이 인생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한테는 꽁꽁 숨겨둔 비밀이 있다
다름아닌 다이어트 계획이다
계획 중 어떤 항목도 음식에 대한 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는 지킬 수 없다
굳은 결심과 황홀한 입맛이
서로 쌍벽을 이루며 다툼질을 한다
그래도 결론은 항상 똑같다
황홀한 입맛의 압승
이 세상에는 왜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많은 걸까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음식 얘기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간단히 유혹에 빠진다
내가 먹은 음식의 칼로리가 정직하게
딱 그만큼의 살을 내 몸에 차곡차곡 쌓지만 않는다면 좋겠지만
모든 좋은 것은 다 대가를 치러야하는 법
목표달성을 위해선 나쁜 친구의 나쁜 수첩을 훔쳐야만 한다
핸드백 속 지갑 옆에다 넣어둔 수첩은
거의 분신처럼 친구와 붙어 다녔다
빈틈을 노려 수첩을 훔치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일주일 뒤 친구는 어김없이 나를 불러냈다
펄펄 뛸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수첩을 잃어버려서 컴퓨터에 저장한 걸 복사해왔다며
A4용지를 내밀었다
그동안 그 수첩을 더 잘 써먹은 사람은 나니까
새 수첩은 나더러 사달라고 했다
이것 역시 내가 치러야할 대가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나쁜 수첩을 펼쳐 맛집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다른 친구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
모든 친구가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그 친구들도 나를 나쁜 친구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 by | 2007/08/24 00:11 | 짧은 이야기 | 트랙백 | 덧글(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